이름 모를 가로등은 그림자를 비춘다

ISBN : 979-11-92134-53-6

저자 : 김새운, 하현태, 여휘운, 황수영, 도승하

페이지 수 : 224p

발행일 : 2023. 11. 28.


책 소개 :

살아가면서 알게 되는 것의 개수만큼이나 많아지는

모호하고 어려운 것들을 바라보는 꼼꼼한 눈빛

 

어떤 감각은 처음 만나 푸르게 선 날을 드러내고

시인들은 그것을 다 끌어안아 시로 담았습니다.

 

싱싱한 감각이 상하고 무를 때까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재어보는 가상의 실험

 

자세하고 밀도 높은 상상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도록 하는 일

우리만의 방식으로 공감과 위로를 날려 보냅니다.

 

자유롭게 책장과 종이를 넘어 다니는

다정한 날갯짓을 전합니다.



출판사 서평 : 

인간의 정서를 함축적 언어로 표현하는 문학, 바로 시詩라는 장르입니다. 그저 ‘짧은 말’이 아닌, 짧은 문장 안에 깊고 깊은 뜻을 안고 있는 그런 언어.

우리는 시를 통해 추억을, 사랑을, 그리고 아픔을 되돌아보고, 기꺼이 시인의 언어에 주파수를 맞춥니다.

김새운, 하현태, 여휘운, 황수영, 그리고 도승하 시인은 저마다의 언어로 우리 삶을 이야기 합니다. 깊고 깊은 그들의 언어, 지금 우리 곁에 필요한 것은 ‘시인을 통한 인간의 교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저녁, 이름 모를 가로등은 우리 내면을 비추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를 비추고 있나요?



저자 소개 : 

김새운

눈앞에 보이는 세상에 숨어들 곳이 보이지 않을 때

글자들 속으로 들어가 숨을 쉬고

한 낱말에 기대어 하루 종일 울기도 했습니다

어떤 날 어느 순간에든

원하시는 글자 속으로 들어와

마음껏 쉬었다 가실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현태

사람이 좋아 글을 쓰기 시작했고, 글을 통해 좋은 사람을 만났다.

이제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글을 쓴다.

시집 <유음>등을 썼으며, <시슐랭가이드>(공저), <싱싱한 생각을 팝니다>(공저)를 기획했다.

  

 

여휘운

하루의 끝,

행복의 듦.

 

행복을 숨겨두었습니다.

보물찾기의 술래

 

세상에는 쉽게 찾을 수 있는

행복이 참 많습니다.

 

아프면서도,

소중한

그런 세상입니다.

 

  

황수영

생애 처음으로 그리움을 글로써 가두고

젖은 눈꺼풀을 매만지며 해방감을 느꼈다

나의 술잔을 가득 채워라

나의 살점이 될 것이니

천지사방에 비명이 낭자하여도

이제는 헤어나갈 방법을 아나니

제일 먼저 알 수 없는 얼굴로 글을 담을 테니

  

 

도승하

아픔을 소리 나는 대로 썼더니 울음이 되었습니다.

나는 매일 울고 있지만 그것이 슬프지 않습니다.

아픔을 덜어내고 있는 것이니까요.

오늘도 내 손끝에서 태어난 글자는 울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든 아픔을 쓰고 있습니다.


책 속 내용 :

<보존의 법칙> _ 김새운

 

무더운 바람이 불어와도

손부채질밖에 할 수 없을 때 가끔

익숙한 학교 종소리를 듣는다

소리를 따라 얌전히 내 자리에 앉는다

 

과학 선생님은 오늘도

우리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

나는 곁눈질로 칠판을 바라보고

선생님은 그 무엇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그럼 수조에 떨어뜨린 한 방울 빨간 물감은

어디로 가는지

오늘은 하필 3일이어서 선생님은 내게 물었다

 

떨어진 물감이 어디로 갔는지

물 분자 사이로 파고들어

붉은 기를 감추는 방법을 생각하다

나는 잠시 더 멀리 다녀온다

무엇도 사라질 수 없다니

무엇으로도 사라질 수 없다니

 

찬 바람이 부는 걸 보니 냉방을 시작했나 보다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빨간 물감 한 방울의 나와 커다란 수조 속

틈이 허락되지 않는 세계에

물고기가 등장하는 것을 상상했다

물속에서 숨을 쉬는 것을 상상했다

 

 

 

 

<대뜸 느닷없이> _ 하현태

 

 우리는 대뜸 연락해야 한다

부지런히 살다 서로가 궁금하단 이유만으로

목소리를 잊을 것 같다는 이유로 전화를 걸고

안부가 궁금하단 이유로 짧은 인사말을 보내야 한다

 

꺾인 목으로 향을 내는 꽃처럼

쪼그라들고 색이 바랜 꽃잎처럼

 

희미한 과거에 살며 미미한 미래를 헤매며

결국 녹아 없어질 얼음을 기어코 넣어 마시며

 

우리는 느닷없는 연락을 주고받아야 한다

평범한 일상에 묻은 서로를 기억해내야 한다

그저 그런 하루에 서로를 덧그려야 한다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정성스레 화병에 담긴 꽃처럼

까치발을 들고 세밀히 보게 되는 꽃잎처럼

 

그렇게 대뜸 느닷없이

우리는 이어져야 한다

 

 

 

 

<구두쇠> _ 여휘운

  

마음 주기 꺼려졌다

마음은 등가가 아니었다

되돌아오는 것은 상처였다

 

점점 인색해졌고 나와만 주고받았다

나에게 상처받을 리는 없으니까

 

실들이 끊어지며 고치가 되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헌책방이 되었다

꿈을 꾸지 않는 스크루지가 되었다

 

마음은 등가가 아니었다

나와 주고받는 내 마음도

 

못쓰게 된 마음들은

이름도 없는 돌이 되었다

 

하루하루 돌탑만 쌓으며

소원조차 빌 수 없는

혼자가 되었다

 

 

 

<이별> _ 황수영

 

기별도 주시지 않고요,

이렇게 가시렵니까?

 

살다 보니 맞는 말 이였소

마지막은 웃는 낯으로 바랜 사랑을 보내주고 싶다는 말이,

마음이

 

당신은 내가 착하다 그랬지만

나는 나를 위해 웃었소

마지막까지 한 점 쓸모없는 희망으로 어여쁘고 싶었소

누가 더 아플 지 그 뻔한 것을 셈하며 그랬소

내가 그렇게 미련한 것을

착하다고 하셨소

 

그러니 기별 없이 떠나셔도 괜찮소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그저 꿈처럼 당신이 몰려올 때는 하늘도 모르게 울 테니

가뿐히 가시오

나 없이 행복하시오

오래오래 사시오

 

아프고 젖은 것은 나 하나면 되지 않겠소

 

  

 

<내 삶의 이야기> _ 도승하

 

하루의 마지막을 기록하려

펜을 들고 무언가를 써 내려갔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통 당신 이야기더군요

여전히 내 하루는 당신인가 봅니다

언제쯤이면 내가 당신 없는 온전한

내 하루를 보낼 수 있을지

나는 아직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하루 속에 당신은

여전히 나와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누군가 내게 사랑이 무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당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무엇을 위해 당신을 기록하는 거냐고

물어온다면 그저 내 하루를 쓰는 거라고

그렇게 대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기가 여러 권이 되어

그 끝에 다다른다면

내 삶의 이야기를 마쳤노라고 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