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바깥

ISBN : 979-11-92134-48-2

저자 : 신대훈

페이지 수 : 328p

발행일 : 2023. 10. 27.


책 소개 :

나는 날마다 익숙한 듯 낯선 관통을 느꼈다.

그리하여 드러난 속살의 온기를 믿기로 했다.

자주 장막을 걷어 홀연히 소스라치고

다시 돌아오기 위해 하염없이 멀어지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이 닿기를 바란다.


출판사 서평 : 

익숙한 듯 낯선 하루,

그 경계 너머에서 마주한 삶의 조각들에 대하여.

 

면면히 살펴보면 우린 매일 다른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 마주한 사람들, 그들과 나눈 이야기, 스치듯 들은 음악, 우연히 읽은 책 속 한 페이지의 문장⋯. 그러고 보면 어느 것 하나 어제와 똑같은 것이 없습니다. 마음을 괴롭히던 일도 어제 일이 되면 그 색이 조금은 옅어지는 것처럼요. 그럴 때면 깨닫곤 합니다. 마음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환기가 필요하다는 것을요.

 

신대훈 작가는 자신이 마주하는 하루를 가능한 마음의 바깥에서 바라보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써 내려간 모든 하루는 적당한 온도로 데워져 있습니다. 읽는 이에게 너무 뜨겁게 다가가지도, 차갑게 멀어지지도 않는, 적당한 거리에서 작가는 덤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안에서 보는 풍경과 밖에서 보는 풍경은 결코 같을 수 없기에 신대훈 작가는 기꺼이 마음의 바깥에, 하루의 바깥에 서 있기로 합니다. 그만이 할 수 있는 조금 다른 방식의 위로, 『하루의 바깥』. 한 문장, 한 문장 깊게 고민하고 세심하게 매만진 작가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꽤 괜찮은 하루를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입니다.


저자 소개 : 

신대훈

 

99년 출생

쓰는 사람

 

모든 생을 세밀히 사려하고 연민하는 인간이 되려 한다.

지은 책으로 에세이 『결국 모든 날이 괜찮지 않았지만』이 있다

 

인스타그램 @eou_ns


책 속 내용 : 

옛 사진 (p.30)

 

그리운 것들을 떠올리는 밤에는 나에게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잠깐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몇 시간이 훌쩍 가버리는 경험을 종종 한다. 어느 주제로 시작해서 전혀 동떨어진 과거로 아슴아슴 가 있기까지. 말이 자꾸만 용솟음치다가 문득 흘러버린 시간을 뒤늦게 자각하는 순간이 있다. 하염없는 그 시간은 삶을 통틀어 귀중하다. 그때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새롭게 아름다웠다.

 

어쩌다 옛 사진을 보았다. 안방구석 어딘가에 사진첩이 있었는데 줄곧 잊어버리고 살았다. 나는 사진들을 찬찬히 훑어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내 마음에 파고든 정념은 한 점 낭만이나 아련함이 아니라, 이루 말할 수 없는 억눌림과 고통, 담을 수 없는 생의 우수가 몰려왔다는 것을. 그것들은 아프고 아름다웠다.

 

대충 다섯 정도의 내가 동생과 함께 서 있고, 그 뒤로 엄마가 배경이 되어있는 사진이었다. 엄마의 뒤쪽으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비행기가 하나 서 있었다. 날씨는 따뜻해 보였다. “엄마 이날 언젠지 알아?” 엄마는 미간을 모아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글쎄? 저 코트가 너 세 살 때 산 건데, 다섯 살 때까지 입었거든. 아마도 이천사, 오 년 정도?” 더 묻지 않았는데 엄마가 말을 이었다. “이때는 정말 아무것도 없을 때네….” 엄마는 말끝을 떨어트렸다.

 

엄마의 ‘이때’나 ‘아무것도’에는 젊은 날의 무질서와 피로가 쌓여 있었고, 그 시절을 어떻게든 살아온 자신에 대한 아련한 다독임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추억이라기보다는 좀처럼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에 가까울 것이었는데, 엄마는 눈빛을 올올이 풀어 한참 사진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알지 못할 미소를 지었다. 생의 전반부를 지난 사람의 얼굴은 마침내 미소였다.


나는 문득 엄마가 추워 보였다. 엄마의 미소는 얼음에 그어지는 실금 같았다. 금방이라도 허공에 눈처럼, 투명한 보석처럼 흩어질 것 같았다. 대한민국 중년의 피부는 너무 얇다. “괜찮아 잘 살아왔어. 살아냈어. 엄마.” 엄마는 조용히 울었던 것 같다.

 

이따금 아늑한 세계에서 치유를 받는다. 조금 전 꾼 꿈처럼 조금 있다가 멀어지는 것을 본다. 분명 삶은 가난했고 지독했고 처량했고 힘겨웠지만, 그날들이 있기에 다만 오늘이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그리운 것들을 떠올리는 밤에는 나에게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다정을 건네야겠다.

  

 

 

고요한 슬픔 (p.128)

 

다정한 것들이 드문 다녀간 자리에는 무늬가 있었다.

  

가로등이 드문 저녁거리는 적요하고 어두웠다. 길섶에 심어진 나목은 사람의 뼈마디 같았다. 저것에서 어떻게 초록 잎이 자라날까 상상하면 무서워졌다. 나무에도 심혈이 있다면 무엇으로 양분을 얻을까. 따끔한 빛과 한 방울의 물이 그것일진대, 우연을 기다리며 수명을 연명하는 처지가 무릇 사람과 다른 게 무엇일까. 텅 빈 하늘은 절망을 쏟아내기에 바빠 보였다.

어떤 마음은 흘러가게 해야 한다. 고여 버리면 그저 무력한 슬픔의 존재를 자각하게 될 뿐이라고, 발밑으로 진 그늘은 독촉하고 있었다. 슬픔을 모아다가 어디에 쓰려고 자꾸 주워 오는지. 이런 일에 조금씩 법석을 떠는 것이 나의 병이다. 어쩌면 도처에 슬픔을 그러모아 잎을 움트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양분은 손끝으로 간다. 하지만 글자는 말이 없다. 글자가 전부가 되어 버린 삶은 어눌하고 쓸쓸한 법이다. 나는 글을 씀으로 존재하는 듯했는데, 글은 자꾸만 나를 글에서 멀어지라 했다. 시체처럼 미동도 없는 글에서 나는 흐트러졌다. 덧없는 것들은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은 모든 것이라고, 이내 냉정한 비수를 꽂았다. 늘 그렇게 외롭고 새롭다.

진회색 하늘에 구름은 없었고 그러나 다정한 것들이 드문 다녀간 자리에는 무늬가 있었다. 사라지지 않으려면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고꾸라지기 직전에 홀연히 알아차렸다. 맑게 갠 날에는 어제의 잘못을 써 내려야지. 그토록 비웃던 현실에 발을 딛고서, 서로의 가슴팍에 씨앗 하나를 묻어야지. 꾸역꾸역 버텨서 서로의 상실을 나누는 순간을 사랑해야지.

슬픔은 곧 약속 같은 떨림이 되어있다. 무엇인가 자꾸만 요동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