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윤곽들

ISBN : 979-11-92134-09-3

저자 : 권덕행

페이지 수 : 112p

발행일 : 2022. 4. 7.


책 소개 :

축축한 것, 그래서 부끄럽거나 미안한 것들은 부재나 상실, 죽음과 같은 말들로 곧잘 치환된다. 그래서 나의 당신은 슬프고, 당신의 나도 슬프다. 그 무엇도 차마 들일 수 없는 빽빽한 슬픔에 대해 시인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각자의 슬픔을 상상만 하다가 각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혼자 삼키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더듬어 보는 것, 슬픔이 조금 더 깊어지더라도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을 같이 나눠보고 싶다고 시인은 말한다. 슬픔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것, 나의 것과 그들의 것은 찬란하고 으슥하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시인은 삶의 최전선에 있는 슬픔을 모두 부려놓고 더는 슬퍼지지 않기로 했다. 잘 버틴 슬픔에 관해 이야기한다. 비로소 시인은 안정된 슬픔 속에 서 있다.


출판사 서평 :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과 이야기를 전합니다. 말로 글로, 그리고 행동으로. 시인이 건네는 말에는 그보다 조금은 깊은 사유(思惟)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깊어 그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때도 있죠.

시집 <사라지는 윤곽들>에서 권덕행 시인은 인간의 슬픔, 인생의 부재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슬픔을 모두 부려놓고 더는 슬퍼지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비로소 안정된 슬픔 속에 서 있다는 시인. 시인의 그 시간에 기꺼이 함께 해보고자 합니다.

시를 좋아하는 당신께 그 시간을 자유롭게 해 줄 <사라지는 윤곽들>을 선사합니다.

 


저자 소개 : 

권덕행

 

들어줄 어른이 없어서 누구보다 먼저 어른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시를 떠올렸다. 시는 나를 다른 차원의 시간으로 데리고 가 주었고 위태로운 나를 견디게 해 주었다. 시를 쓸 때만은 나를 잊을 수 있었다. 살면서 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 시가 어쩌면 온기를 전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울시인협회가 발행하는 시전문지 <월간시>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독립문예지 『베개』 6호에 참여했다.

 

인스타그램 @write_dh.kwon


책 속 내용 :

나의 열렬한 피사체 (p.39)

 

 지나친 시선이 멈칫,

 호명하는 순간 정물이 되는

 

 단정한 생각처럼 기록된다

 너하고 너뿐인

 

 기억의 저쪽이 차갑게 응결된다

 

 망설이던 것들도 시간이 된다

 

 기억은 기억의 바깥에서만 극적이다

 사진 속, 나의 열렬한 피사체

 

 너는 떠났고

 퍽이나 자연스러운 눈웃음만 남아 있다

 

 난파된 흉곽에 밤이 내리면

 아직 도망가지 못한 것들

 가장 추운 자세로 매달려 있다

 도처에

 

 

 

그들만의 체온 (p.72)

 

 유독 머리숱이 많은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머리숱이 많은 사람 혹은 몸에 털이 많은 사람의 체온

은 어떨까

 비밀을 간직한 사람들은 몸에 털이 많다든지 머릿속이

복잡한 사람들은 머리숱이 많다든지 그런 것들과 연관이

있을까, 당신은 물었지

 

 털이 많은 사람은 틀림없이

 그들만의 체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나를 사랑하는 생각에 골몰하

는 당신은 무서울 정도로 뜨거웠지만 늘 혼자 웅크리고

자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무언가 빼먹을 게 없으면 당신의 온기라도 거두어 갈

까 봐 그랬을까

 

 마음 한쪽도 내주지 않는 사람들은

 체온 유지에 실패할 리가 없다

 자신의 체온만으로도 한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몹시 추운 날

 자신의 체온을 건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사진 속 너에게 (p.96)

 

 시원하니, 얘야

 헤프게 엎질러 놓은 웃음 뒤로 차가운 계곡물이 흐른

여름이었구나

 

 있잖아

 나는 늘 참아 내는 사람이었지만 너한테는 좁고 가파

르게 굴었고

 나는 마치 타고난 천성처럼 질서 정연하게 구는 사람이

었지만 너한테는 늘 변주하듯 널뛰었고

 나는 사실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지만 너한테는 온통

내 소리로 가득 채웠구나

 

 열었다 닫았다

 열렸다 닫혔다,

 너와 나의 시차들

 

 미안하다

 니가 자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니 생각을 한다